지용·백석 … 한국 현대시의 기틀 닦은 두 천재

천줄기바람 2013. 7. 17. 10:20

지용·백석 … 한국 현대시의 기틀 닦은 두 천재

[중앙일보] 입력 2013.07.15 00:23 / 수정 2013.07.15 08:16

정전 60년 1953~2013 - 월북·납북 문인이 남긴 유산 ② 현대시, 새롭게 태어난 전통성
정지용 - 독창적이고 세련된 언어 감각
백석 - 모더니즘과 향토색 탁월한 조화

청록파 시인에 큰 영향을 미친 정지용은 김영랑·박용철 시인 등과 함께 순수시 운동을 주도한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활동했다. 1929년 ‘시문학’ 창간호에 실린 창립동인 기념 사진이다. 뒷줄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이하윤·박용철·정지용·변영로·정인보·김영랑. [중앙포토]

정지용과 백석은 분단시대의 희생자지만 분단의 벽을 뛰어넘어 한국현대시의 흐름을 바꾼 대표적인 시인이다. 둘 다 서구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이를 한국적 전통으로 승화시켜 후대의 전범이 됐다.

 정지용의 시는 우선 청록파에 의해 계승된다. 박목월은 향토적 서정을, 조지훈은 고전적 혁신을, 박두진은 종교적 깊이를 개척했으며 청록파의 시는 더 넓게 확장돼 박목월의 제자인 오세영·이건청·조정권이나 조지훈의 제자인 정진규·오탁번·김명인 등으로 그리고 박두진의 제자인 정현종·강은교·천양희 등 여러 갈래의 서정시로 퍼져나갔다.

 백석의 시는 중학교 시절 처음 백석의 시를 읽고 감동과 충격을 느꼈으며 시집 『사슴』을 ‘시를 공부하는 교과서’로 삼았다는 신경림을 선두로 ‘모닥불’을 전범으로 삼은 최두석은 물론 백석의 시 구절 ‘외롭고 높고 쓸쓸한’을 시집의 제목으로 한 안도현, 민중의 보편적 감정을 노래한 정일근·문태준 등의 리얼리즘적 서정시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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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시의 혁신과 파괴=1902년 충북 옥천에서 출생한 정지용은 일본 교토 유학시절 ‘조선지광’과 일본의 문예지 ‘근대풍경’ 등에 작품을 발표했다. 1920년대 중반부터 문명을 날렸으며 1930년 『시문학』 동인으로 참여하며 국내문단의 선두주자로 부각됐다. 첫 시집 『정지용시집』(1935) 간행을 계기로 지용은 1930년대 한국 모더니즘 시의 대표적 시인으로 지칭됐다. 초기의 ‘향수’ ‘유리창’ 등 지용의 명성을 드높인 시편들과 더불어 ‘바다 2’와 같이 발랄한 기지를 엿보게 하는 시편도 그의 입지를 확고히 하는 데 기여했다.

 지용은 잠시 가톨릭 신앙시를 쓰기도 했지만 두 번째 시집 『백록담』(1941)에서 보여준 고전적 세계의 탐구는 한층 심화한 시적 도약을 입증하는 근거가 된다. ‘비’ ‘구성동’ ‘백록담’ 등에서 보여주는 산수시의 탐구와 산문적 형태로 그는 최초의 모더니스트라는 종전의 평가에서 한걸음 나아가 전통을 혁신시킨 현대시의 아버지로 격상됐다.

 지용의 산수시는 자연에 대한 탐구이며 인간의 삶에 대한 탐구다. 억압의 식민지시대 지용이 택한 시의 길이 거기에 있었으며 그가 시도한 산문시는 종전 자유시 형태의 파괴와 혁신을 도모했다는 점에서 도전적인 것이었다.

 지용 이전에 지용 같은 시인은 없었다. 같은 해 출생한 김소월의 노래하는 슬픔의 시와 아주 다르다는 점에서 지용은 독창적이었다. 지용의 시는 정서를 물질적 이미지로 변용시켜 조형적 견고성을 부여했으며 이를 통해 한국의 근대시는 현대시로 탈바꿈했다.

 48년 남북분단은 지용에게 큰 생의 시련을 안겨 줬다. 그는 좌우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울을 떠나 녹번동에 은거하고 있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홀연 납북됐다. 여름 홑저고리 차림으로 제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집을 나섰다고 전해진 뒤 실종됐으며 북한 당국의 공식 자료에는 의정부 부근에서 미군의 폭격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북에 있던 아들 삼남 구인씨가 남에 있는 아버지를 만나겠다고 2001년 제 3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현장에 왔으나 큰형 구관씨만을 만나 눈물을 흘리던 모습이 보도됐다.

 ◆모더니티를 품은 향토주의=1912년 평북 정주에서 출생한 백석은 시집 『사슴』(1936)으로 강요당한 근대의 질주를 역행하는 듯한 폭탄을 세상에 던지며 혜성과 같이 시인으로 등장했다. 김기림은 이 시집에 대해 “주책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했다.

 시집 『사슴』에서 백석은 기층 민중의 삶 속에서 원초적 생의 감정을 발견하고 이를 민중 자신의 토속적 언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평북 정주지방의 낯선 방언의 돌출과 산문적 형식의 서술적 시행은 동화와 전설의 세계에 새로운 모더니티의 입김을 불어넣었다.

 첫 사랑의 실패가 한 요인이 됐을 것이라 알려졌지만 백석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 시인이었다. 그는 자신이 국내 최초로 번역한 토머스 하디의 장편소설 『테스』를 출간하기 위해 1940년 서울을 일시 방문했지만 이후 만주 지역에서 측량 서기 보조나 소작일 등을 했다. 명작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을 쓰던 때 그의 자의식을 지배한 것은 운명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운명에 희생당한 인간의 모습은 테스와 백석의 유사성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부분이다.

 백석의 불행은 분단으로 더욱 극명하게 전개됐다. 분단 이후 고향에 체류하다가 북에서 활동하게 된 자유주의자 백석은 당의 혁명문학에 적응하지 못하고 러시아문학 번역에 전념하는데, 이 시기 그는 러시아 혁명기 문학을 대표하는 숄로호프의 대하 장편 『고요한 돈』(1949)을 비롯해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슈킨 등의 작품을 번역했다. 백석의 번역은 최유찬이나 방민호가 논증한 것처럼 백석 특유의 언어감각이 그대로 살아 있어 문학적 가치가 뛰어난 것으로서 평가된다.

 러시아 휴머니즘 문학에 공명한 백석이 아동문학에 힘을 기울여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1957)을 간행한 사실도 간과할 수 없는 업적이다.

백석에게 비운의 순간은 불의에 닥쳐왔다. 58년 10월 부르주아 잔재청산을 요구한 당의 ‘붉은 편지’ 사건으로 백석은 평양문단에서 산골 오지인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의 국영협동조합의 현지지도원으로 파견된다. 인생의 전반부는 조선의 천재 시인으로, 인생의 후반부는 추방된 양치기로 30년 넘게 살아야 했던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백석의 문학은 ‘한국적 페시미즘의 절창’이라고 본 유종호를 필두로 김현·고형진·이숭원 등에 의해 연구됐고 이동순·송준·김재용·김문주 등에 의해 자료발굴이 계속됐지만 최근 공개된 자료들에 대한 적극적 연구가 과제로 남아 있다. 백석을 재평가하는 것은 식민지시대 말 한국문학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일이며 분단시대 한국문학의 전체성도 다시 평가하는 일이 될 것이다.

 종전 60주년을 돌아보는 오늘의 시점에서 일반 독자는 지용보다 백석을 선호하는 듯하다. 지용의 조탁된 언어보다 백석의 토속어가, 지용의 지적 엘리트주의보다 백석의 민중적 서정성이 독자에게 호응을 얻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두 천재 시인은 한국 현대시사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을 지닐 것이다. 최동호(고려대 국문학과 교수)

 

 

 

 

 

통영 처녀 '란', 함흥서 만난 '자야' … 모던 보이 백석의 사랑

[중앙일보] 입력 2013.07.15 00:24 / 수정 2013.07.15 08:16

사랑은 시의 자양분이다. 백석의 절창도 그를 스쳐간 아프고 애틋한 사랑에서 비롯했다. 당대 인기가 컸던 ‘모던 보이’ 백석은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노천명(1912~57)과 최정희(1906~90) 등 당대 주요 여류 문인도 백석에 대한 애정을 작품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로 시작하는 노천명의 대표작 ‘사슴’의 사슴은 백석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런 인기에도 백석의 사랑은 늘 비극적이었다. 백석이 ‘란(蘭)’이라 지칭한 경남 통영 출신의 박경련(사진)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여인이었다. 백석은 이화고녀를 다니던 박경련을 보고 한눈에 반했지만 박씨 집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된다. 박씨가 그의 친구이자 조선일보 동료 기자였던 신현중과 결혼하자 충격을 받고 함흥으로 떠난다. 박씨를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통영’ 등과 ‘남행시초’ 연작으로 남는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으로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1916~99)씨와의 사랑이야기도 인구에 회자된다. 실연의 충격에 허우적대던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보 회식에서 만난 김씨와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김씨를 ‘자야’라 부르며 서울 청진동에서 잠시 동거하기도 했지만 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헤어진다.

 38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자야를 그리는 시로 알려져 있지만 백석이 제자 김진세의 누이를 흠모해 청혼한 뒤 퇴짜를 맞은 실연의 상처를 담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자야의 연인 백석, 한국 서정시의 학교

[중앙일보] 입력 2013.07.11 00:58 / 수정 2013.07.11 08:51

정전 60년 1953~2013 - 월북·납북 문인이 남긴 유산 ① 현대문학의 한 기둥 월북 문인
전문가 16인 설문조사
한국 문학에 영향 끼친 시인
정지용과 함께 1, 2위 꼽혀
소설가는 박태원·이태준

‘하눌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초생달과 박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중)

 이 시에서 제목을 따온 안도현(52)의 시 ‘초승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는 ‘당신의 그늘을 표절하려고 나는 밤을 새웠다’란 문장으로 시작된다.

 백석(1912~95)을 닮고픈 안 시인뿐만 아니라 미당(未堂) 서정주(1915~2000)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 서정시의 맥을 잇는 것으로 평가되는 장석남(48)·문태준(43) 시인도 백석의 영향을 부인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북한에 머물며 활동한 역사적 제약에도 ‘한국 서정시의 오래된 학교’라 불릴 만큼 백석의 그늘은 넓고 깊다. 2005년 미당문학상(중앙일보 주최)을 수상한 문태준 시인은 “백석은 궁벽한 곳으로 몰린 삶을 잘 견뎌낸 천재적 시인이었다. 내게 외롭지만 높은 정신이었다”고 말했다.


 백석의 『사슴』(1936)이 월북·납북 작가의 시집 중 한국 문학에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시집으로 뽑혔다. 자의든 타의든 북한으로 넘어간 문인들이 우리 문단에 남긴 유산을 되짚기 위해 중앙일보가 한국문학평론가협회(회장 김종회 경희대 교수)와 함께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다.

 조사에 참여한 북한문학 전문가 16명 중 절반(8명)이 백석의 『사슴』을 첫손가락으로 꼽았다. 1988년 월북 작가 해금(解禁) 조치 이후 관련 문인에 대한 연구가 꾸준히 진척돼 왔지만 그들의 문학적 성취를 설문조사로 평가하기는 처음이다.

 하상일 동의대 교수는 “『사슴』은 1930년대 서구적 모더니티의 수용과 토착적 전통주의의 결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 시의 근대성을 구현했다”고 평가했다. 백석은 서울 성북동에 있던 요정 대원각을 ‘무소유’의 법정(1932~2010) 스님에게 길상사로 내놓은 김영한(자야·1916~99) 여사와의 각별한 사랑이야기로도 유명하다

 시인 중에는 정지용(1902~50)이 압도적(9명)이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얼룩백이 황소가/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향수’ 중)처럼 새로운 감각과 언어를 선보인 정지용은 30년대 당시 ‘운문은 지용(芝溶·시인 정지용), 산문은 상허(尙虛·이태준의 호)’라는 말이 있을 만큼 독보적인 경지를 개척했다.

 정지용은 후진 양성에도 큰 자취를 남겼다. 문예종합지 ‘문장(文章)’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지훈·박두진·박목월 등 청록파를 등단시켰고, 이들의 시작(詩作)은 한국 시단에 다양한 갈래로 뻗어 나갔다. 윤동주(1917~45)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문을 쓰며 윤동주의 시를 문학적으로 평가한 것도 정지용이었다. 최동호 고려대 교수는 “정지용은 한국 근대시에서 현대시로의 전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말했다.

 구보(仇甫) 박태원(1910~86)은 ‘의식의 흐름’ 등 모더니즘적인 기법을 도입하며 한국 소설의 획기적인 변화를 이끌어낸 소설가(7명)란 평가를 받았다. 박태원의 대표작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최인훈(77)과 주인석(50) 등 후배 소설가에 의해 변용돼 새롭게 태어났다. 박태원은 월북한 뒤에도 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남겨 “남북한 문학사에 모두 지분을 가진 작가”(김종회)란 의견도 있었다.

 한국 단편소설의 미학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 이태준(1904~56)의 영향도 컸다. 순수문학을 표방한 구인회(九人會) 회원으로 활동한 그는 일제강점기 조선중앙일보 문예부장으로 일하며 박태원과 이상(1910~37)의 실험적인 작품을 소개하는 등 한국 현대문학을 위한 토양을 닦았다.

 벽초(碧初) 홍명희(1888 ~1968)의 『임꺽정』은 한국 문단에서 대하장편 소설의 계보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는 “『임꺽정』은 민족어와 풍속사의 보고인 동시에 리얼리즘 문학의 가능성을 확보해 황석영의 『장길산』과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이 탄생할 수 있는 초석을 놨다”고 말했다.

 시인 박세영(5명)과 설정식(3명), 소설가 김남천(3명)과 김사량(3명), 한설야(2명)·안회남(2명) 등은 체제와 이념의 갈등 속에 문학적 성과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작가로 꼽혔다. 설문에 응한 전문가들은 “역사 속에 묻힌 작가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이데올로기를 넘어선 균형 잡힌 시각과 폭넓은 시야 ▶북한에서의 작품 활동에 대한 공개와 자료 발굴 ▶남북한 공동 문학 연구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현옥 기자

◆설문 응답자(가나다순)=고현철 부산대 교수, 고인환 경희대 교수, 김용희 평택대 교수, 김종회 경희대 교수, 김진희 이화여대 교수, 송승환 시인·문학평론가,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 오형엽 고려대 교수, 유성호 한양대 교수, 이광호 서울예대 교수, 이명재 중앙대 명예교수, 이성천 경희대 객원교수, 이재복 한양대 교수, 최동호 고려대 교수, 하상일 동의대 교수, 홍용희 경희사이버대 교수

 

꼭꼭 숨었던 백석 시 ‘머리카락’ 찾았다

[중앙일보] 입력 2009.03.16 01:53 / 수정 2009.03.16 11:39

42년 매일신보에 한글 원문
평안도 생활 정서 보는 재미

고향인 평안북도 사투리, 고어(古語), 사전에서 잠자던 순우리말 등을 과감하게 사용해 우리 현대시에서 모국어의 활용 영역을 크게 넓혔다는 평가를 받는 시인 백석(1912∼95년 사망 추정)의 시 한 편이 발굴됐다. ‘머리카락’이라는 제목의 시로, 지금까지는 한글 원문이 없어 1940년대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2004년 한글로 다시 번역한 ‘중역본’만 존재했다. 원광대 김재용(국문과) 교수가 2년 전 발견한 한글 원문을 반년간 시 잡지 ‘시인’의 올해 상반기호에 발표해 수수한 맨얼굴이 드러났다.



◆어떻게 찾았나=김 교수에 따르면 ‘머리카락’은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시인 김종한(1916∼44년)이 일본어로 편역해 43년 박문서관에서 펴낸 한국시 선집인 『雪白集(설백집)』에 ‘髮の毛’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존재 사실조차 경남대 박태일(국문과) 교수가 2004년 출간한 『한국 근대문학의 실증과 방법』(소명출판)에서 이를 다시 한국어로 번역해 ‘머리오리’란 제목으로 소개해 알려졌다. 2007년 출간된 『정본 백석 전집』(문학동네) 등 지금까지 나온 5종의 백석 전집에서 모두 빠져 있는 작품이다. 김재용 교수는 ‘머리카락’을 매일신보 영인본 42년 11월 17일자에 실린 김종한의 글 ‘조선 시단의 진로’에서 찾아냈다. 김 교수는 2007년 김종한 연구를 위한 자료를 찾다가 이 시를 만났다.

◆어떤 시인가=백석은 다채로운 시어(詩語)를 사용하되 구체적인 삶의 현장을 시 속에 끌어들였다. 그런 특징은 ‘머리카락’에서도 뚜렷하다. 시는 동서지간인 세 여성이 머리카락을 모아 추녀에 끼워두었다가 봄날 모시조개로도 바꿔 먹고 화장용 분도 구입한다는 내용이다. 김 교수는 “ 주변부 여성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고 말했다. 정현종 시인은 “평안도 지역의 세시풍속, 서민들의 생활 정서를 엿보는 재미가 있다”고 평했다. 정 시인은 또 “‘꼭두손이’는 뿌리에서 빨간 염료를 얻는 풀인 꼭두서니를 뜻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백석, 어떤 시인인가=평안북도 정주 태생인 백석은 해방 후 북한에 남았다. 88년에야 공식 해금됐지만 80년대 중반부터 시인·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고려대 고형진(국어교육과) 교수는 “백석은 낯선 시어 사용, 이야기하듯 시를 풀어가는 방식 등 소월과 지용이 다진 현대시의 기틀 위에 새로운 시 문법을 세웠다”고 평했다. 안양대 맹문재(국문과) 교수는 “지금은 백석의 시대다. 김소월·윤동주 등을 제치고 국문학 석·박사 전공자들이 가장 많이 연구한다”고 했다.

 

 

통영 처녀 '란', 함흥서 만난 '자야' … 모던 보이 백석의 사랑

[중앙일보] 입력 2013년 07월 15일


사랑은 시의 자양분이다. 백석의 절창도 그를 스쳐간 아프고 애틋한 사랑에서 비롯했다. 당대 인기가 컸던 ‘모던 보이’ 백석은 많은 여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노천명(1912~57)과 최정희(1906~90) 등 당대 주요 여류 문인도 백석에 대한 애정을 작품으로 표현할 정도였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로 시작하는 노천명의 대표작 ‘사슴’의 사슴은 백석을 가리켰다고 한다.



 이런 인기에도 백석의 사랑은 늘 비극적이었다. 백석이 ‘란(蘭)’이라 지칭한 경남 통영 출신의 박경련(사진)은 그가 평생을 두고 사랑한 여인이었다. 백석은 이화고녀를 다니던 박경련을 보고 한눈에 반했지만 박씨 집의 반대로 결혼은 무산된다. 박씨가 그의 친구이자 조선일보 동료 기자였던 신현중과 결혼하자 충격을 받고 함흥으로 떠난다. 박씨를 만나기 위해 통영을 찾았던 기억은 시 ‘통영’ 등과 ‘남행시초’ 연작으로 남는다.



 요정 대원각의 주인으로 법정 스님에게 길상사를 기부한 김영한(1916~99)씨와의 사랑이야기도 인구에 회자된다. 실연의 충격에 허우적대던 백석은 1936년 함흥 영생여고보 회식에서 만난 김씨와 사랑에 빠진다. 백석은 김씨를 ‘자야’라 부르며 서울 청진동에서 잠시 동거하기도 했지만 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헤어진다.



 38년 발표한 그의 대표작 ‘나와 나타샤와 당나귀’는 자야를 그리는 시로 알려져 있지만 백석이 제자 김진세의 누이를 흠모해 청혼한 뒤 퇴짜를 맞은 실연의 상처를 담은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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