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미술사

마네 1832~1883 Édouard Manet

천줄기바람 2012. 7. 9. 11:49

에두아르 마네는 프랑스의 인상주의 화가이다.19세기 현대적인 삶의 모습에 접근하려 했던 화가들 중의 한명이었다. 그의 초기작인 <풀밭위의 점심식사>와 <올랭피아>는 엄청난 비난을 불러 일으켰으나 반면에 수 많은 젊은 화가들을 주변에 불러 모으는 힘이 되었는데, 이들이 후에 인상주의를 창조하였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정작 인상파의 일원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의 화풍의 특색은 단순한 선 처리와 강한 필치, 풍부한 색채감에 있다.

 

ㅇ.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 1859. 캔버스에 유채 181*106 칼스버그 미술관, 코펜하겐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2Fi1&articleno=11709263#ajax_history_home

 

 


1. 놀란 림프 1861. 1859 캔버스에 유채 144.4*112.5 뮤제오 나시오날 드 벨라 아르테, 부에노스아이레스, 아르젠티나

 

 

 

http://blog.daum.net/misulmun49/15961560

http://mijk21.net/m/3699274

 

 

2. 풀밭위의 점심 식사 1863. 캔버스에 유채 208*264.5 오르세 미술관 소장

 

 

당시 사회에 만연한 경박한 부르주아들의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그림

이 작품은 당시 프랑스 사회가 지닌 가식적이며 이중적인 도덕성을 고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http://blog.daum.net/geoaca/12045881?srchid=IIM5Nz5O000#A2076360F4AAEF38D147BCE

http://blog.daum.net/hwawoo/1492

http://hanulh.egloos.com/818486

 

3. 올랭피아 1863. 캔버스에 유채 130.5*190 오르세 미술관 소장

 

 

 

 

 

http://hanulh.egloos.com/1918323

 

 

4. 흰 모란꽃 가지와 화훼가위 1864  캔버스에 유채 31*46.5  오르세 미술관 소장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ppolli&logNo=20057820515

http://lifelog.blog.naver.com/PostThumbnailView.nhn?blogId=chansol21&logNo=50036026355&categoryNo=18&parentCategoryNo=

 

 

5. 피리부는 소년 1866 캔버스에 유채 161*97 오르세 미술관 소장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h0400&logNo=60127359190

 

 

6. 에밀 졸라의 초상화 1868 캔버스에 유채 146.5*114 오르세 미술관 소장

 

http://jaewonart.co.kr/bbs/bbs/board.php?bo_table=bbs4_1&wr_id=11

 

 

 

7. 나나 1877 캔버스에 유채 154*115  함브르크 아트센터 소장

 


 

 

8.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1881~1882 캔버스에 유채 130*96 코롤드 미술관 소장

 

 

http://blog.daum.net/misulmun49/15962167

http://blog.naver.com/limej37/110001414162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jch0400&logNo=60127359190

 

1832.1.18

출생. 할아버지는 시장, 아버지는 판사. 부유한 집안에서 자람.

외삼촌에게 데생을 배움

1846

공부는 못했지만, 화가가 될 소질이 보임

[디드로가 동시대 화가들을 향해 어차피 세월이 지나면 유행에 뒤질 모자를 무엇 때문에 그리느냐고 꾸짖는 대목에서 마네가 소리를 질렀다.”디드로도 멍청한 놈이었군. 화가는 자신이 산 시대를 증언해야 하는 거야. 유행 따위와는 상관없이 자기가 본 것을 그려야 해“라고 했다. ]

1849

해군 시험에 여러 번 낙방 후 쿠튀르의 화실에서 수학함.

1852.1.29

피아노 선생 수잔과 사랑에 빠져 20살 때 아들 레옹이 태어남.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해 수잔이 혼자 아들을 키움.

~1853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여 여러 대가들의 화법을 익힘.

회화론과 미술 비평을 읽으면서 미술에 관한 공부를 스스로 함.

1855

나폴레옹 3세가 만국박람회 개최.

쿠르베의 사실주의에 의한 아방가드로 정신의 선언. 순수미술, 즉 ‘예술을 위한 예술’을 추구하는 진보주의 예술가들의 정신을 말함.

19세기 중반 일부 예술가들이 자신들의 모델을 하류층도 사용.

1856

쿠튀르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고 화실에서 나옴.(6년간 수학했음)

<갈대를 든 그리스도>,<괭이를 든 그리스도>미완성.

1864

<그리스도와 천사들>,<군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예수>그림. 명목만 가톨릭 신자. 500점도 더 되는 그림중에 6점만이 기독교를 주제로 함.

1858~59

<압생트 마시는 사람> 벨라스케의<메니프>로부터 영향 받음. 단순화 시키는 기교를 사용.

바닥의 술병은 모델이 독한 압생트에 중독된 자임을 강조. 이 그림에서 처음으로 밝은 노란색으로 그림의 분위기를 강렬하게 만듦.

1861

레옹이 아버지가 마네임을 알게 됨.

<놀란림프> 아내 수잔을 모델로 함. 첫 누드 작품. 관람자와 그림과의 관계가 새로워짐. 관람자가 모델의 긴박하고 개인적인 모습을 바라볼 수 있게 됨.

1862

이 시기에 파리는 건축붐과 새로운 철로들이 개설.

정거장 주면의 걸인과 집시들을 모델로 그림을 그림

<늙은 음악가>,<넝마주이>,<담배를 들고 있는 집시>

이질적인 인물들을 배열하여 구성한 그림. 고대 철학자의 모습처럼 앉히고 아이들의 호기심과 사랑을 받는 순진한 사람으로 묘사했는데 그리스 철학자 코리스포스를 묘사한 헬레니즘 조각을 변형한 것. 모자를 쓴 흰색 옷을 입은 아이는 와토의<피에로>를 상기시키고, 옆의 아이의 얼굴에는 호기심이 가득. 아이를 안고 있는 소녀도 호기심에 찬 눈으로 늙은 걸인을 바라봄. 걸인은 기념촬영이라도 하듯 관람자를 바라봄.

<거리의 가수>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무명 여가수를 묘사한 작품. 화실 근처 거리를 거닐다가 여가수가 카페 밖으로 한 발 내딛는 장면을 목격. 모델은 빅토린. 입가의 붉은 버찌가 노란종이, 갈색.회색.초록색의 드레스와 대조되게 구성. 일본 판화의 영향으로 배경을 어둡게 하여 환한 얼굴이 뚜렷이 나타나게 했고 이런 점이 마네의 독특한 요소로서 의도적으로 구성한 연출.

<발렌시아의 롤라>,<스페인 발레>,<스페인 가수> 는 스페인 문화를 회화의 주제로 삼음.

복잡한 무늬와 화려한 색의 스페인 의상은 그들의 기질을 적절하게 나타냈으며 프랑스인들은 그들의 열정적인 춤을 좋아했다. 마네는 보들레르의 권유로 이 공연을 관람한 후 매우 만족해했다.

<스페인 가수> 코믹한 배우처럼 나타났지만 붓놀림이 대담하며 사실주의 색채가 강하다. 그가 탐구해온 대가들의 장점이 두루 나타난 그림으로 배경을 어둡게 하고 조명의 호과를 극적으로 살린 작품. 색가 색의 대비가 인물을 강렬한 인상으로 기억에 남게 함.

1863

<소파에 앉아있는 보들레르의 애인>원근법이 과장되었으며, 멀리서 바라본 잔느의 모습이지만 흰 드레스가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너무 크고 드레스 사이로 삐져나온 다리는 유난히 작은데 오른손은 오히려 크다. 한번의 포즈로 그려진 것이라서 미숙한 부분이 있다.

<풀밭에서의 오찬> 주말이면 중산층에 강가로 피크닉을 가는 것은 흔한 일. 하지만 여인이 누드로 남자들 사이에 앉아 있는 경우는 없었다. 이것은 과격한 회화적 시도였으며 이런 모습을 본 관람자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이 그림에서 누드 뿐 아니라 앞의 세 사람의 구성(마르크 앙투안느의<파리스의 심판>을 현대적으로 해석), 옆으로 쓰러진 바구니, 정물 등의 부분 묘사가 뛰어남. 국전에 출품하여 낙선하자 낙선전을 통해 시민들에게 소개됨.

<올랭피아> 흑인 하녀는 어렸을 때 본 노예시장 모습의 강렬한 인상에 의한 구성임. 누드의 여인으로 하여금 관람자를 빤히 쳐다보게 함. 과거의 화가들은 모델이 다른 곳을 응시하게 해서 관람자가 누드를 제삼자를 바라보듯이 거리낌없이 바라볼 수 있도록 했지만, 마네는 모델을 이인칭으로 그려서 관람자를 직접 바라보게 했다. 그림과 관람자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설정한 것으로 관람자와 그림이 더욱 친숙하게 되었다.

1863~75

카페 게르부아에서 젊은 화가들의 모임인 ‘바티뇰 그룹’이 이루어짐. 모네와 마네가 처음 만남.

르누아르, 드가, 세잔, 휘슬러, 에밀졸라 등이 자주 왔음. 국전에 관해 주로 대화하며 새로운 경향의 미술에 관해 의견을 나눔.

1864

<키어사지 전함과 알라바마 전함의 전투>6.19일 남부동맹의 알라바마 전함과 북군 전함 사이에 전투가 벌어짐. 이 날의 전투를 생생하게 캔버스에 담음. 직접 목격하지 않아도 전투상황을 신문이 매우 자세히 보도했기 때문에 자세히 본 듯이 그릴 수 있었으므로 논란이 되고 있었는데, 편지에 의해 신문과 잡지의 삽화를 보고 상상력으로 묘사했음을 알 수 있다.

1865

<독서> 화면의 오른쪽 상단에 독서하는 레옹이 소파의 윗부분에 손을 얹고 몸을 의지하고 있어 환상적인 느낌이 사라짐. 왼쪽에는 화초가 잘리운 채 잎들만 보이는데 사물을 가장자리에서 자르는 구성은 일본 판화의 영향.

<투우장면> 마드리드를 방문하여 투우경기를 즐겼으며,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관람하고 감동받음. 이 때 스케치한 장면을 파리에서 완성. 벨라스케의 영향보다는 검정색을 기본으로 여러 가지 색을 조화시키는 기교를 사용하기 시작.

1866

<피리부는 소년> 벨라스케의영향(배경을 없애고 여백을 어두운 색으로 칠해 환상적 요소로 사용하는 기교)과 일본 회화법(단순한 구성이 오히려 주제를 힘있게 해준다는 점)이 혼용됨. 소년의 발뒤꿈치에 약간의 그림자를 넣어 단지 빛의 방향과 깊이만을 관람자가 알게 함. 소년의 청순함과 남자다움을 강조했음.

1867

<1867년의 만국박람회> 마네가 처음으로 그린 파리 장면. 박람회장을 멀리서 바라본 장면으로 그려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 듯하다. 개를 끌고 가는 소년은 레옹.

마네 개인전을 엶. 비용 때문에 쿠르베와 마네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음

“사람들이 걸작품 앞에서 웃었다.” 라고 함.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의 처형> 막시밀리안이 멕시코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생김. 막시밀리안의 죽음을 폭로하겠다는 결심으로 황제의 처형장면을 그림. 총살을 집행하는 군인들이 프랑스 군복을 입고있는데 이는, 이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이 나폴레옹 3세에게 있음을 시위한 것이다.

고야의 <1808년5월3일>과 비교하면 고야는 영화의 한 정면처럼 극적으로 표현된 데 비해 마네의 그림에는 전혀 그런 점이 없어 사실주의에 더욱 가까운 그림이 되었다. 마네는 총에서 불이 뿜는 좀 더 사실적인 장면을 묘사함. 처형당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당당하고 총알을 장전하는 군인의 얼굴은 무덤덤하다.

 

1868

<에밀졸라의 초상> 에밀졸라는 마네의 옹호자임. 마네의 장점으로 “정확성과 간결성”을 꼽음. 그림에서 두 사람의 밀접한 관계를 말해주는 여러 장치들이 있다. 책상 위에는 졸라가 마네를 위해 쓴 책자가 있고, 벽에는 일본 판화와 함께 올랭피아가 있는데 이들의 시선이 모두 졸라에게 향하고 있다.

<발코니> 세 모델들은 마네와 절친한 예술가. 우수에 차지만 개성이 강하고 미모가 강렬하게 표현된 베르테 모리소는 루부르에 갔을 때 소개받은 여인. 그녀의 커다란 눈과 강한 시선이 매우 인상적. 파라솔을 든 여인은 수잔과 협연한 바 있는 바이올린 연주자 클라우스. 나중에 마네의 친구인 화가 미에르 프린스와 결혼함. 남자는 풍경화가 안토냉 기유메. 배경에 어렴풋이 보이는 커피를 나르는 소년은 레옹.

<불로뉴 해변> 처음으로 인상주의 화법으로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을 분명하게 묘사하지 않고 색을 적당히 쓱쓱 문질렀다. 이런 방법은 오히려 과학적 사실주의에 근거한 것인데 사람이 어떤 지점을 바라볼 때 시선이 닿는 곳은 분명하게 볼 수 있지만 주변의 것들은 불분명한 형태로 인식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을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에서 볼 수 있다. 하늘, 바다, 육지를 삼등분하여 평행으로 구성했으므로 매우 안정감을 주고 파노라마 형식의 그림이 됨.

1869

<휴식> 모델 베르테는 상류층 집안 출신. 얼굴에서 강렬한 개성을 보는데 그녀 스스로 자신만만한 화가임을 시위하려는 듯 함.1873년의 국전을 통해 소개되었는데 훌륭한 가문의 규수가 거만한 자세를 취한 것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는지 국전 카탈로그에는 이 그림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베르테는 마네의 화실을 방문하면 늘 자주빛 소파에 앉았는데 어느 날 비스듬히 기대앉은 모습을 그린 것. 포즈를 보면 마네의 주문에 의해서 취한 포즈라기보다는 스스로 그런 포즈를 취했다는 느낌이 든다. 아주 편한 자세를 취했는데 이런 포즈를 다른 화가들의 그림에서는 찾아 볼 수 없다. 현대인답게 그녀는 주위 사람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편한 대로 포즈를 취했는데 모더니즘이 개시되었음을 시위라도 하는 듯 보인다.

1872

<베르테 모리소> 검정의상에 높은 모자를 쓴 베르테의 얼굴을 색으로 이등분하면서 밝고 어두운 색을 병렬시켰는데 조명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긴급하게 사용한 붓질이 베르테의 표정을 재빨리 포착했다. 피부색과 양 눈동자의 검정색의 대비는 배경의 상아색과 모자, 스카프, 의상의 검정색과 증폭되는 대비를 이후면서 우아한 조화를 이룬다. 색을 평편하게 사용하는 방법은 일본 회화의 영향이었고, 검정색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것은 스페인 화풍의 영향.

1873

제1회 인상주의 전을 통해 모네의 인상이 소개 된 후, 분명하지 않은 빛의 효과를 포착하려는 모네의 노력이 짧은 붓질로 나타난 것이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화법이 됨. 모네는, 카탈로그에 실릴 제목을 물어왔지만, 이 그림을 르아브르의 풍경이라고 정직하게 말할 수 없어서 인상이라고 했다고 한다.

<생라자르역> 이 그림은 마네의 고도의 기교와 지성적 복잡함이 나타난 가장 이상적인 예임.1830년대 말부터 기차가 파리시내를 달리게 되었고, 마네는 철도에 관심이 많았지만 배경으로만 사용함. 기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기차가 방사한 연기만 보이는데 기차가 지금 역으로 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구도에는 참신함과 청색, 흰색의 조화가 주는 아름다움이 있다.

1874

<보트 스튜디오에서 그림 그리는 클로드 모네> 모네는 배를 개조하여 물에 뜨는 화실로 사용함. 이를 흥미롭게 생각한 마네가 그림. 이 그림에서 인상주의 화법을 사용함. 마네가 처음으로 야외에서 그린 그림임.

<아르장퇴유> 모네의 화법이 좀 더 분명히 나타남. 뱃사람은 여인에게 수작을 부리는 것 같고, 여인은 관심 주지 않으며 건성으로 사내의 말을 듣고 있다. 마네의 그림에서 여인들은 상대방을 의식하지 않고 무심한 표정으로 포즈를 취하는 경우가 흔하다. 원근감을 느낄 수 있는 요소들을 넉넉히 구성했지만 강물을 지나치게 파란색으로 칠했기 때문에 원근감이 많이 감소됨. 이 작품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자연주의 화풍을 확인시켜주었으며 이 점이 새로운 화법으로 바람직함을 시위함.

<보트놀이> 다른 그림들과는 달리 붓질을 가늘게 하지 않고 색채도 영롱하게 하기보다는 바깥 공기의 신선함을 색조로 나타내려고 했음을 본다. 강렬한 물빛의 효과는 모네의 영향이며 수평선을 생략한 과감한 인물 구성은 일본 판화의 영향이다. 마네는 두 모델을 그림 앞쪽에 구성했으므로 배의 일부분만 보일 뿐이며 마네의 눈 위치가 모델의 머리 위였으므로 관람자는 배의 내부를 볼 수 있다. 눈의 위치가 높기 때문에 수평선은 보이지 않고 강물만 모델들의 배경이 되어 커다란 여백으로 나타났으며 파란색의 강물이 관람자의 눈을 시원하게 해주는데 강물 외에는 아무 것도 배경에 없으므로 원근감보다는 이차원적인 면이 강조되었다.

<베네치아의 대운하> 제1회 인상주의전이 열린 해 마네는 베니스로 가서 이 그림을 그림. 여기에서 인상주의 기법으로 풍경을 그렸다. 모네는 여기에서 빛 자체에 역점을 두고 그린 데 비해 마네는 빛에 쌓인 사물에 역점을 두었다. 붓질을 가느다랗게 사용하고 대상의 시재감과 자연주의 색체를 희생가면서까지 프리즘과도 같은 빛이 굴절하는 물에 마네는 몰입할 수 없었다.

1877

<자두> 드가가 마네와 수잔의 초상화를 그려준 대가로 답례한 그림. 작품 구성상 자두주가 있기 때문에 제목이 자두이고, 모델의 장밋빛 피부와 드레스를 강조함.

일화로, 수잔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아 그림을 훼손하였고, 드가가 <자두>를 돌려보내자 다른 곳에 팔아버렸다. 마네와 가장 가까웠던 사람은 모네였다.

<나나> 졸라의 소설[나나]가 출간되기 전에 먼저 그림. 1877년 국전에서 낙선. 무도회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전신상의 진부한 작품으로 보여 졌고 그림의 모델이 화류계에서 익히 알려진 매우 앙리에트 오제였으므로 국전 심사위원들로서는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 부르주아의 이면을 보여주는 장면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려고 몰려들음. 신사의 기다림에 위축된 여인의 모습과 허황된 신사의 모습이 대조됨. 배경에는 일본 벽화에서 볼 수 있는 물가를 거니는 학의 모습이 있다.

1878

<모니에가의 깃발> 이 해 6월30일 파리는 만국박람회를 축하하는 국경일로 축제 분위기였다. 경축을 마친 후의 적막함을 나타낸 마네의 그림은 허전하고 낯선 풍경. 나부끼는 깃발보다는 피서 철을 맞아 거리에 나타난 빛과 어둠의 조화에 더 관심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한쪽 다리를 잃은 상이군인의 쓸쓸한 뒷모습과 보도 옆에 멈춰 선 마차는 국경일을 바라본 마네의 시각(축제가 남긴 분위기)이라고 해야 할 듯 함.

<가슴을 드러낸 금발> 마네는 말년에 새 모델을 선정했는데 댄서 출신의 메리 로랑. 두 사람은 연인이 됨. 이 그림을 그릴 당시 이미 다리에 통증이 있었던 터라 유채물감을 수채물감 사용하듯 엷게 타서 빠르게 그리면서 작은 크기로 그렸다. 마네는 주로 초상화를 그렸지만 이처럼 모델의 얼굴을 불분명하게 그린적은 없었다. 모델의 머리카락, 드러난 가슴과 걸쳐진 옷자락에 나타난 붓 자국은 표현적이고 전보다 단순한 방법이며 이차원적으로 아누 평편해졌다. 양귀비꽃은 녹색 배경과 대조되어 두드러지게 나타남.

78년 첫 번째 마비 증세로 화실에서 쓰러진 후 마네는 병마와 싸우게 됨. 정신적 고통이 더 심해서 그가 스스로 이제 “끝났다”고 생각한 것도 이 무렵.

1880

<산책>파리 근교 벨레뷔에서 머물면서 미망인 감비를 그린 것. 주위의 푸른색으로 여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는 않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젊은 여인의 세련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부드러운 붓놀림으로 여인의 눈에서 지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했으며, 갸름하고 돌출된 턱과 이목구비를 적절히 묘사함.

<카페의 실내> 11월 초에 게르부아로 가서 그림. 육체적 고통이 그로 하여금 오래 선 채 그림을 그릴 수 없게 했으므로 짧은 시간 내에 그릴 수 있는 것들만 그렸고 물감이 마르는 데 시간이 걸리는 유화로 그림을 마칠 수 없을 때는 파스텔을 혼용하여 서둘러 완성시켰다.

<햄><수정 화병의 클레마티스> 이제는 병마와 싸우느라 대작을 그리는 대신 꽃이나 과일 주변에 있는 정물들을 그림.

1881

<베르사유의 예술가 정원> 마네는 별로 효과가 없다고 생각하여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고 베르사유에 있는 정원이 딸린 별장을 빌려줘서 그 곳에서 지냄. 이 그림의 벤치에 앉아서 쉬곤 했음. 벤치에 마네가 남겨둔 노란색 옷이 있어 그의 보재를 시사하며 그의 감성이 느껴진다. 당시 마네의 신체적, 정신적 고통에도 불구하고 이 정원은 매력적인 여름의 한 장면처럼 보임.

1882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마네가 카페의 장면을 마지막으로 그림. 웨이트레스의 뒤 거울에 술집 내부가 비쳐 많은 사람이 즐겨 찾는 곳임을 알 수 있고 모자를 쓴 남자가 거울에 비친 웨이트레스와 마주하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다. 웨이트레스를 중산층이나 노동자 출신으로 보이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거울에 의해 환상적인 분위기가 한껏 고조된 작품. 거울에 비쳐진 화려한 파리의 세계, 불빛 아래 서성이는 남자와 여자들의 실재감을 느끼게 하는 술병과 과일의 대비 등 마네의 회화가 절정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꽃과 술병들을 마네에 의해 연출. 거울 속 웨이트레스의 뒷모습과 오른편 남자의 앞모습이 원근법적으로는 일치하니 않지만 마네는 이런 모순을 개의치 않았다. 마네는 불가해한 장면을 연출하면서 우리의 인식세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회화에서는 이 같은 세계가 가증하다는 것을 역설하려는 듯 함.

1883

4월 30일 세상을 떠남. 51세가 된지 3개월 7일만에 죽음.

마네는 차세대 화가들에게 회화의 새로운 통로를 열어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