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잘 쇠셨는지, 오랜만에 친인척들을 만나 화기애애한 기억을 갖고 돌아오셨을 터, 이참에 오백 년 전통에 항거한 무용담 한 토막을 들려드리고 싶다. 필자가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조상도 모르는 놈!’이 된 사연을 말이다. 부친은 이 말을 달고 사셨다. 추로지향(鄒魯之鄕)인 안동과 자웅을 겨루느라 제례를 과도하게 발전시킨 영주(榮州) 출신이라 더욱 그랬다. 부친은 호를 아예 효응(孝應)이라 지으셨다. 효로 조상 은덕에 응하면서 사시는 신조는 탓할 바 아니나 그 실행 의무가 베이비부머인 장남에게 온통 실린다는 게 문제였다. 유교 문화의 막내 세대, 그것도 충효사상에 세뇌된 베이비부머에게 부모의 신념과 조상숭배는 종교였다. 그러니 종교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는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존재하지 않았다.
제사는 그냥 넘어가면 양속이고, 따지면 불화다. 오십 줄까지 효응 선생의 신조에 착실히 응하던 중 불경스러운 회의가 들었다. 이 많은 음식, 투여한 노동, 친인척의 출석, 그리고 총총히 흩어진 뒤의 허망함은 도대체 뭐지? 제사 후 느긋하게 음복하시던 효응 선생의 표정과는 달리 장남의 지식창고에는 반란이 싹텄던 거다. 반란은 곧 기획연구로 이어졌는데 제례를 창안한 조선 유교의 비밀을 기어이 밝혀냈다. 그것은 통치 이데올로기의 실행 방식이었다.
성리학을 개국이념으로 택한 조선의 건국 세력은 불교 탄압과 함께 민간의 주술신앙과 음사(淫祀)를 엄격히 금지했다. 소격서를 세워 무당과 무격을 내쫓았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조상과 하늘을 들어앉혔다. 제례(祭禮)와 제천(祭天)이 그것이다. 경복궁 좌측에 종묘를 지어 조상숭배의 기초를 마련하고,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곡식신과 토지신에 길운과 풍년을 빌었다. 조선법전인 『경국대전』에 제사 규칙을 정해 반포했다. ‘6품 이상은 3대 봉사, 7품 이하는 2대, 서민은 부모 제사만 지낸다’. 먹을 게 없던 시절, 빈곤한 서민은 위패에 절하는 것으로 족했고, 제수(祭需)는 형편에 따랐다. 그런데 가문과 문벌의 위세 경쟁이 격화됐던 조선 후기 봉제사는 문중 대사, 가족의 최대 행사로 변질됐다. 1년 20회 정도 제사를 행하지 않으면 양반이 아니었던 당시의 풍조에서 신분 향상을 열망했던 서민들도 제례 경쟁에 뛰어들었던 것이다.
몇 년 전, 설 제사를 정중하게 지낸 후 필자는 연구결과를 조심스럽게 발표했다. 유교가 종교 기능을 벌써 상실했고, 한말(韓末)을 기준으로 친가, 외가, 처가에 벼슬한 사람이 없는 한족(寒族) 서민이 분명하므로 이제 제사는 무용하다는 주장을 폈다. 조선이 역사에 묻힌 마당에 통치수단인 제례의 의미는 소멸됐음을 부가했다. 주자학 선조 안향 선생을 배향한 소수서원에서 반경 백리 안에서 사셨던 효응 선생의 표정은 곧 험악해졌고, 베이비부머의 반란에 최후통첩을 날렸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그 최후통첩에 결국 무릎을 꿇는 게 오륜(五倫)의 도리였지만 어리석게도 그만 베이비부머의 합리성을 발동하고야 말았다. ‘저의 앎과 지식을 배신할 수는 없습니다!’ 이쯤 되면 세대 간 전선에는 화염이 인다. “조상도 모르는 놈들!” 철저한 사전 모의에도 불구하고 이 호통 하나로 자식들은 부모 세대의 성곽으로 투항했고, 장남에게도 얼른 항복하라는 묵언의 신호를 보냈다. 필자는 제사 간소화론으로 타협에 나섰지만 효응 선생은 분노에 치를 떨며 노구를 끌고 귀가했다. 협상은 깨졌다.
필자는 연구결과를 칼럼에 썼다. 며칠이 지나 연구실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안동 태생의 70대, 명문대 출신 공무원이었다고 밝힌 노신사의 질문은 이랬다. “사실 나도 제사를 고민 중인데, 송 교수가 주장한 논리의 역사적 근거가 어디에 있는가?” 필자는 아주 소상하게 기획연구의 경로를 말했고, ‘예법에 사로잡힌 제례’의 폐지를 주장했다. 온갖 제물을 폐하는 대신 밥, 국, 북어포, 냉수에 술 한잔이면 족하다고 말했다. “음-.” 저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지지자를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할 요량으로 나는 부가 설명에 들어갔다. 동학 창시자인 최제우는 간소화를 주장해 네발짐승의 고기를 금하고, 국, 밥, 나물 정도만 권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아예 청수(淸水)만 올리도록 했고, 무엇보다 마음가짐을 중시했다는 점을 말이다. 조금 뜸을 들인 뒤 그가 투항했다. “나도 그렇게 할랍니다!”
‘평화롭고 오롯한 명절’은 결렬된 협상의 작은 전리품이다. 휴전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여전히 불안한 평화다. 그러니 ‘조상도 모르는 놈!’을 되뇌고 계실 효응 선생이 걸린다. 설은 잘 쇠셨는지, 일가 친지들과 재회의 기쁨을 갖고 돌아오셨는지, 귀성객들이 보낸 고향의 설날도 궁금하긴 마찬가지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조상숭배의 나라 - 송호근| 작은책방
임미정(8) | 조회 15 |추천 0 | 2010.09.28. 00:41
지난 추석 명절을 잘 쇠셨는지, 부모와 일가친척은 평안하신지, 조상은 만나뵈었는지, 그리고 청명해진 가을밤 그윽한 달빛을 맞으셨는지. 우리 정서엔 꼭 들어맞는 이런 인사의 뒤편에는 앞앞이 말 못하는 갑갑증과 파열음이 꿈틀대고 있다. 부모, 친지와의 만남이 항상 저 환한 달빛과 같으면 좋으련만, 가족사엔 언제나 기대와 원망들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어 서로의 감정선을 건드리지 않으려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한 게 명절이다. 말이 명절(名節)이지 수백 년 대물림된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한 시간이 아닐 수도 있다. 한국만큼 명절이 제례(祭禮), 특히 조상 제사로 일관되는 나라를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한말 개화기 선교사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미몽의 백성을 ‘고요한 아침의 나라’ ‘은자의 나라’로 뭉뚱그려 묘사했는데, 세계에서 유례없는 조상숭배 열기만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은 물론 주변국인 일본과 월남에서도 조상 제사를 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교문화권, 아니 세계에서 한국이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위패 앞에 은덕을 비는 나라가 된 까닭을 정작 우리도 잘 알지 못한다. 얼마나 감격스러운 풍경인가라고 어른들은 짐짓 위엄스러운 표정을 짓겠지만, 남녀 간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비용조달에 가슴앓이하고 시간을 쪼개 품앗이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끊이지 않는 게 요즘의 추세다. 아마 귀경길에서 언쟁깨나 했을 부부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 소중한 시간을 의례에 쏟아붓고 허둥지둥 돌아설 때 그런 회의가 들지 않겠는가. 우리는 왜 이렇게 유별난 ‘조상숭배의 나라’가 되었을까?
1894년 영국의 지리학자 비숍 여사는 오백 년 도읍지 한양에 종교시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 종교 없는 제국은 없다는 문명사적 시선으로 보면, 사찰은커녕 공자 사당 하나 없는 유교국가의 수도가 이상했을 것이다. 대신 그녀는 무속과 민간신앙에 푹 빠져 있는 조선인들을 목격했다. 콜레라가 습격한 마을엔 고양이 그림이 붙어 있을 정도였다. 가는 곳마다 무당이 있었고, 으슥한 곳마다 귀신이 살았다. 귀신 종류도 다양해 그녀는 36가지 귀신 이름을 세다가 그만두었다. 이 과도한 무속과 민간신앙을 조상제례로 전격 대치한 계기가 바로 조선 건국이다. 고려 말까지도 명절은 하늘과 자연을 경외하는 집단축제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조선은 민간신앙을 일소할 방법을 주자학에서 찾았다. 제천(祭天)과 제사(祭祀)가 그것이다. 경복궁 우측에 사직단을 지어 하늘신과 토지신에게 제례를 올리고, 좌측에 종묘를 지어 제사의 기원을 마련했다. 15세기 말 성종은 아예 『경국대전』을 편찬해 국법으로 반포했다. 예제(禮制)에 이런 조항이 있다. ‘6품 이상 문관이나 무관은 3대까지 제사 지내고 7품 이하는 2대까지, 일반 서민은 부모에게만 제사 지낸다.’ 잡신을 섬기는 자는 처벌되었다. 빈곤한 서민은 위패를 모시고, 명절 땐 두어 가지 음식으로 족했다. 굶는 판에 더 차릴 것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양반이 향촌을 장악해 가는 과정에서 봉제사는 충군효친의 규율 수단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엄격한 격식과 요란한 상차림이 강제됐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경쟁으로 변했다.
유교는 내세관이 없는 게 특징이다.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불교와 주술신앙이 사라지지 않은 이유다. 미국 선교사 헐버트는 『대한제국멸망기』에서 ‘코레아인들은 사회생활에서는 유교에, 사고방식은 불교에 속하며, 곤경에 빠지면 귀신을 믿는다’고 썼다. 21세기 대명천지에 귀신을 믿는 사람은 이제 없어졌고, 외래종교가 유입되자 한국은 다종교사회로 변했다. 그런 와중에 유교는 제천(祭天) 기능을 다른 종교에 넘겨주고 주로 생활의례, 특히 제례(祭禮)로 살아남았다. 명절이라는 축제의 시간을 제사로 종종걸음을 쳐야 하는 ‘조상숭배의 나라’가 된 역사적 배경이다.
이런 내력을 알았다고 해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조상을 기리는 방식은 여럿인데 왜 반드시 상차림 형식이어야 하는가, 그리고 조상숭배가 왜 자기 가문(家門)에만 국한돼야 하는가. 전자는 덮어두고라도 후자는 의미심장하다. 탁월한 학자와 선비, 그리고 민족 영웅과 구국의 정치가들이 가득한 오천 년 역사에서 국민 모두가 사랑하고 존경할 선현들을 기리는 데는 인색했다. 명절마다 천여만 명이 이동하고, 집집마다 족보 하나쯤은 갖춘 세계 유일의 ‘조상숭배의 나라’에서 다 같이 숭배할 조상이 이처럼 없는 것도 너무 특이하지 않은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최동성 칼럼] 조상숭배의 형식최동성(본지 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추석이 다가온다. 종교의식 치르듯 올해도 고향 길에 오른다. 실물경제 경고음이 귀성객들의 마음을 바닥으로 내려놓지만 민족 대이동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곳엔 조상이 있고 반가운 부모 형제와 친척들이 있기 때문이다. 한 데 모여 차례와 성묘를 통한 산 자와 죽은 자의 공동체 확인은 자신과 공동체를 성숙하게 만들어 새삼 '민족의 명절'을 실감하게 한다.
그렇지만 말이 명절이지 대물림 행사를 치러야 하는 그 시간은 누구에게나 흐뭇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명절이 세계에서 찾아보기 힘들게 제례(祭禮), 특히 조상 제사로 일관되는 국가라는 이유에서다. 유교 문명의 종주국인 중국과 주변국인 일본에서도 조상 제사가 목격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조상 제사를 지내는 유일한 나라가 된 까닭, 오늘날까지도 후손들이 위패와 지방(紙榜) 앞에 은덕을 비는 까닭을 정작 잘 알지 못하겠다. 감격스럽고 위엄스러운 분위기가 있을 것이다. 반면 남녀의 불합리한 역할, 가족 간 불공평한 노력봉사와 비용조달에 가슴앓이를 하고 품앗이해야 하는 번거로움에 소소한 갈등이 나오는 게 요즘 추세다. 안쓰러운 몸짓들이다.
고려 말까지도 명절은 하늘과 자연을 경외하는 집단축제였다. 불교에서 유교로 전환한 조선은 창궐했던 무속과 민간신앙을 일소하고 제천(祭天)과 제사(祭祀)로 전격 대치했다. 15세기 말 성종은 '경국대전'을 편찬해 이것을 국법으로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조상숭배가 통치 이데올로기의 중심에 놓이자 봉제사는 곧 가문의 위세경쟁으로 변한 것이다.
21세기 우리나라는 다종교사회로 바뀌었다. 그런 과정에서 유교는 제천기능을 다른 종교에 넘겨주고 주로 생활의례인 제례로 살아 있다. 명절이라는 축제를 상차림 형식의 의례로 종종걸음 쳐야하는 역사적 배경이다. 하지만 충군효친(忠君孝親) 시대의 규율 수단이었던 봉제사가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는 그런 중압감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사회란 한 시점에서 완성되거나 끝나는 것이 아니라 늘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다. 추석은 자신을 되돌아보는 때이다. 근원적인 자기성찰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명절은 그 변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포기하든, 지키고 싶든 이 시점의 변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다음 명절은 또 달라지는 것이다. 진정으로 지키고 싶은 가치가 뚜렷하게 부각될수록 조상숭배의 형식은 그만큼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실용성과 더불어 산업사회의 핵심가치로 떠오른 편의성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것은 분별력이다. 실용성·편의성이 만나야 할 무대는 우리들의 평가영역이다. 이를 판단하는 데는 세월이 필요하다.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분별력 발휘를 앞당기기 위해서는 결국 사회의 노력이 있어야 한다.
물론 누구나 과거의 방식에 익숙해 있다. 가문의 전통과 정신을 찾는 풍속이나 관행에서는 더욱 집착한다. 그러나 환경이 달라졌는데도 과거 패턴과 똑같이 반응한다면 새 환경에서 그 소중한 가치를 유지하기 어렵다. 위험하다고 가지 않으면 미래세대에 대한 모욕이다. 조상숭배의 형식적 의미가 많이 퇴색했다. 절차와 횟수가 간결해지고 제사음식 대행업소도 생겨났다. 이런 변화의 시기에 '명절 스트레스'를 풀어주는 형식의 변화가 관심사다.
/ 최동성(본지 기획사업국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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