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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티스트 백석 백기행

천줄기바람 2010. 3. 13. 23:19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이생진-


여기서는 실명이 좋겠다
그녀가 사랑한 남자는 백석白石이고
백석이 사랑했던 여자는 김영한金英韓이라고

한데 백석은 그녀를 자야子夜라고 불렀지
이들이 만난 것은 20대 초
백석은 시 쓰는 영어 선생이었고
자야는 춤추고 노래하는 기생이었다

그들은 죽자사자 사랑한 후
백석은 마주땅을 헤매다 북한에서 죽었고
자야는 남한에서 무진 돈을 벌어
길상사에 시주했다

자야가 죽기 열흘 전
기운 없이 누워 있는 노령의 여사에게
젊은 기자가 이렇게 물었다

천억을 내놓고 후회되지 않으세요?
무슨 후회?

그 사람 생각 언제 많이 하셨나요?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는데 때가 있나?
기자는 어리둥절했다
천금을 내놨으니 이제 만복을 받으셔야죠 '
그게 무슨 소용있어 '기자는 또 한번 어리둥절했다
다시 태어나신다면?
' 어디서?  한국에서?
에!  한국?
나 한국에서 태어나기 싫어
영국쯤에서  태어나서 문학 할거야'

그 사람 어디가 그렇게 좋았어요?
' 1000억이 그 사람 시 한 줄만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
이번엔 내가 어리둥절했다

 

김영한(1915∼1999)
기명(技名)은 진향(眞香)이고 筆名은 자야(子夜)이다. 그녀는 시인 백석을 지독히 사랑했던 기녀이며, 백석 또한 그녀를 위해서 많은 연애시를 썼다고 전한다. 백석이 북으로 떠난 후?38선 때문에 그와 생이별한 그녀는 ‘김영한은 백석을 잊기 위해 혼자서 대원각을 냈다.’는 소문이 있고, 우리나라 제일의 요정을 일구어 낸 여걸이었지만,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 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그 담배 연기가 이 가련한 여인을 그냥 두겠는가? 기어이 폐암으로 몰아넣었다.?죽음이 임박해지자 김영한은 자신이 운영하던 요정은 절에, 자신이 만지던 2억 원의 현금은 백석문학상 기금으로 내놓는다. 그리고 '내 사랑 백석'(1995년 문학동네), '내 가슴 속에 지워지지 않은 이름'(창작과비평)을 출간했다.
기자가 물었대! 시주로 천억을 내놓았는데 후회되지 않냐?고, 무슨 후회? 라고 반문했다나바! -그 사람이 언제 제일 생각나냐고? 그랫더니 -사랑하는 사람 생각나는 데 어디 때가 있나! 그랬대요! 기자가 다시 물었대요! -그 사람이 어디가 그리 좋으세요? -
천억이 그 사람의 詩 한 줄 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를 쓸 꺼야! 라고, - 이생진 詩 '그 사람을 사랑한 이유'(시인 백석을 사랑한 김영한)' 에서 -

삶이 무어냐고 묻고 싶거든 길상사를 찾아 가면, 수목 우거진 언덕 한켠에 김영한의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 있다. 삶이란 ~ 그저 그 언덕 위로 불어오는 바람 같은 것이라고... 우리에 삶은 그저 스처 가는 바람이라는 것 ~~~~~
그 김 여사 子夜는 吉祥寺가 문을 연지 2년만인 1999년?83세에 훌훌 서방정토 세계로 떠난 여인! 백석을 위해 전생의 삶을 보낸 멋쟁이 여인이다!
그의 유해는 유언대로 눈이 하얗게 쌓인 길상사 앞마당에 뿌려졌다.

 

 길상사 내의 김영한(법명 吉祥華) 기념비


김영한은 가난한 탓에?약한 신랑에게 몸 팔려간 15살에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이 우물에 빠져 죽는 불운을 맞는다.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 끝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기생의 길을 갈 수 밖에 없었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삼천리 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미모의 기생이었다.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서 함흥감옥으로 찾아 갔으나?만나지 못하고,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 교사들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과?1936년 운명적으로 만난다. 백석은 옆자리에 앉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속삭였다. <오늘부터 당신은 내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 우리사이 이별은 없어요!>
함흥에서는 그가 교사의 신분으로 남의 이목도 있고 했기에, 그가 김영한의 하숙으로 와서 함께 지내다 돌아가는 것이 고작이었다가?김영한이 서울로 돌아가자 백석은 아예 그녀 때문에 학교에 사표를 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조선일보에 근무한다. 그리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리고 서울과 함흥을 오가며 3년간의 동거 생활을 하게 된다.
그러나 백석의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이 못마땅하게 생각했고, 강제로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켰으나 신혼 첫 날밤부터 도망치기를 여러 차례 하면서 부모에 대한 효심과 여인에 대한 사랑 사이에서 백석은 괴로워 갈등하다가 이를 벗어나기 위해 만주로 도피하자고 제의한다. 그러나 그녀는 백석의 장래를 걱정하여 함흥에 남아있기 간절히 바랐지만 백석은 혼자 떠난다.
그때 그를 따라 만주로 가지 않았던 실책으로 그를 비운(悲運)에 빠뜨렸다고 김영한은 늘 후회하며 살았다고 전한다. 그 당시 백석의 심경을 나타샤를 인용해 노래한 詩가 대표적 연애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라고 한다.

 

 

白石(본명 백기행 1912∼1995)은
오산고보를 졸업하고 도쿄로 건너가 영문학을 공부하고, 1930년 조선일보에 시를 투고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했던 백석은 잘생긴 얼굴과 젠틀한 성품, 게다가 청산유수의 말솜씨로 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댄디보이(Dandy Boy)같았다.
그러나 백석(白石)은 많은 여인들 중 자야(子夜)만을 사랑 하였으며, 백석에 아름다운 시(詩)는 시인과 기생의 정염(情炎)을 넘어서 깊고 넓은 그리고 애틋한 사랑의 실체를 느끼게 한다.
해방이 되자 백석은 만주에서 고향 함흥으로 돌아 왔지만, 영한은 이미 서울로 떠나 버렸고 다시 영한을 찾아 서울로 가려 할 때는 38선이 그어져 그들의 사랑은 이승에서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된다. 분단이 만들어 낸 또 하나의 서글픈 사랑으로 기록이 된다. 그 후 백석이 북한체제에서 어떻게 살아갔는지는 알려진바 없지만 90년대 중반까지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월북한 탓에 그의 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불교적인 영향을 받은 큰 시인이었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랑...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함일까? 그녀는 오로지 재산 모으는데 전념을 하게 된다. 그러나 돈을 모을수록 허전함은 더하고, 모진 세월마저 백석에 대한 사랑은 사그라들게 하지는 못했다.
생전에 김영한은 백석의 생일인 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은 일체의 음식을?전혀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子夜는 백석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단 하나의 여인이었고, 그녀 또한 백석에 대한 그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던 여인이었다.

참고: http://blog.naver.com/mijopogu/40102684109